이 공연을 즐긴 날이 4월 28일이니, 벌써 10여일이 지났다, 후기를 대략 메모는 해 두었으나 이어진 긴 연휴를 가족과 함께 하다, 짬을 낼 수 없었다. 그냥 지나갈 수도 있지만 제가 즐긴 공연들을 빠뜨리지 않고 적어 보는 이유는, 다시 한 번 즐기고, 오래오래 기억 하고 싶어서 이며, 또한 남겨 둘 곳 < 한국문화재재단>과 산하 기관인 < 한국문화의 집 KOUS >이 있기 때문이다.
약 10여 년 전에 처음 알게 된 < 한국문화재재단>과 산하 기관인 < 한국문화의 집 (KOUS) >은 늘 고맙고 사랑을 불사르는 곳이다. 나에게 우리 문화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하여 꾸준하게 특별한 관심을 갖게 해 주었으며, 우리 악(樂),가(歌),무(舞)의 맛과 멋,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최고의 공연을 제공 해 주기 때문이다. 여기에 내가 답례하는 방법은 무딘 글로 후기를 남기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 한 고동 올려 보시오” 음반 한 장 틀어보란 말이란다. 이 생소한 말을 가르쳐 준 배연형은 1957년 경북 영주에서 출생하여 1980년대 초 부터 유성기 음반을 수집하고 연구해 왔으며, ‘판소리 소리책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음반에 대한 학술적 이론을 정립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활용 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일을 한다.
일본인은 머리로, 중국인은 가슴으로, 한국인은 배로 노래하는데, 이것을 담아 두고 다시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판소리 근대 5명창 중 한명인 이동백이 태어나기 6년 전인 1860년 먹지에 그으름을 입혀 바늘로 긁어 낸 소리가 처음 이란다. 배영현의 < 반락 >은 이렇게 시작한 음반을 통해 1902년 이탈리아 테너 가수‘ 카루소 ’가 최초로 녹음한 소리와 이동백이 1928년에 서울에서 최초로 유성기음반에 녹음한 단가 <죽장망혜 >를 들려주며 음반의 발전과정과 음반역사 이야기를 시작했다.
1877년 에디슨이 구리로 만든 원통에 석박(錫箔)을 붙이고 이것을 회전시키면서 녹음하고 바늘과 진동판을 써서 이 원통(실린더)으로부터 소리를 재생하는 장치 측음기를 최초로 만들었지만 실용화 되지는 않았다, 1887년 에밀 베를리너가 원반형 레코드를 제작하여 현재와 같은 원반형 음반의 기원이 되었고, '그라모폰(gramophone)'이란 이름으로 특허를 얻어 상업적으로 성공 하였으며 1897년 영국에 그라모폰컴퍼니 지사를 설립했으며, 이후 EMI로 재탄생했다.
우리나라에는 유성기 실린더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1906년 미국 콜롬비아사가 일본에서 녹음한 한국음반 30매가 상업적으로 최초의 우리 소리 음반이며, 1909년 일본 최초 음반 회사를 설립하여 일본자체 녹음을 시작한 ‘일본측음기상회’가 1911년 한국에 진출해 세운 ‘NIPPONOPHONE’사가 우리나라 최초 음반 회사이다.
유성기 바늘은 한번 쓰면 못 쓴다. 유성기음반 회전수는 같은 회사 음반도 다르다, 유성기 음반은 음질의 차이가 있고, 음색이 다른데, 기계와 마이크 차이 때문이라며 정정렬 < 춘향가 자탄가 대목 >을 80회전 유성기음반과 78회전 보통 유성기 음반의 소리로 들려주며 차이점을 찾아보게 했다.
이렇게 약 100여분 동안 처음 들어보는 음반 이야기들이 < 일본 철도가(학도병가)>, 심정순 의 1911년 녹음 춘향가 중 < 남원사령 술주정가>, 박녹주의 1933년 녹음 춘향가 중< 춘당사과>, 이화중선의 1935년 녹음 < 제비가 > 등, 고음반 음악 속에 실려 < 반락盤 >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반락>의 주인공들이 우리 음반사에서 얼마나 소중한 일을 이루어 내고 있는지를 감동으로 전달 해 주었다. 더 없이 값지고 고귀한 음반 이야기쑈 <반락>을 100여명 안팎의 소수의 사람들만 누리고 있는 행복이라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