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로 배우지 못한 또 한 분의 독립운동가 < 박열 >, 일제 36년 동안 조국 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친 수많은 순국선열(殉國先烈)과 애국지사(愛國志士)들 중 한 분이시다. 그래도 이 분은 이제라도 영화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참 다행이며 행운아이시다.
이 영화가 계기가 되어 해방 70년이 넘어가도 아직도 우리들 가슴에 이름 한 자 남기지 못한 수많은 분들이 역사 속에서 소생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박열은 음력 1902년 2월 3일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경성제2고등보통학교(경복고등학교)를 다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고등학생 신분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 의혈단,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 흑도회, 흑우회, 불령사, 회원으로 독립투쟁 활동을 했다.
1923년 일본 내각은 관동(關東) 대지진 여파로 민란 조짐이 보이자, 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고,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계엄령을 선포한다. 이를 계기로 무고한 조선인 6천여 명이 학살당하는 이른바 간토대학살이 벌어졌다.
국제사회의 비난이 두려웠던 일본은 사건 은폐를 위해 ‘불령사’를 만들어 활동했던 대표적 불령선인 ‘박열’을 < 조선인 최초의 대역죄인 >을 만들어 배후로 지목한다. 일본의 계략을 눈치 챈 ‘박열’은 동지이자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일본 황태자 폭탄 암살 계획을 자백하고, 처음 사형을 언도 받았고 이후 일본이 정치적 이익을 노려 무기징역으로 형량 변경을 하여 해방될 때까지 22년 2개월을 일본 감옥에서 복역 했다.
해방이후 귀국 하여 신조선건설동맹 위원장, 재일조선인거류민단 단장, 박열장학회 설립,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장으로 조국통일에 온 힘을 쏟는 활동을 하다 1974년 1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 영화 박열 > 은 “ 조선인 최초의 대역죄인 ” 재판 과정을 집중적으로 보여 준다. 포괄적인 삶의 이야기 보다 한 사건을 집중적으로 파헤쳐 전달하는 의미의 파급효과가 얼마나 큰가를 피부로 체험 할 수 있다. 이 영화가 더욱 더 가슴에 와 닿으며 진정성을 가지게 하는 이유는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가 감옥에서 남긴 1,000장이 넘는 자서전이 있었기에 가능 했다 믿는다.
6월 28일에 개봉하여 10여일이 지난 오늘 까지 1백 50만 명의 관객이 관람 하여 크게 성공한 영화들에 비하면 사람들의 관심도 등, 여러 가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관람하신 분들의 입 소문을 통해 단 한 사람이라도 더 < 영화 박열 >이 세상에 알려지고, 조국 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친 수많은 순국선열(殉國先烈)과 애국지사(愛國志士)들의 사실적 이야기가 우리들의 가슴에 자리 잡을 수 있기를 기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