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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 길현주
월~일 | 02:00 ~ 05:00

21세기 역사전쟁의 시작
  • 작성자dudgns
  • 조회수4159
  • 작성일2014.09.24







대한민국의 역사-나라만들기 발자취 1945~1987






저자 이영훈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 하였고(박사학위) 한신대, 성균관대 경제학부 교수에 이어 2002년부터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로 재임중이다. 경제사학회 회장과 한국고문서학회 회장을 하기도 하였고 현재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장이다.



[머리말]


중고등학교 역삭과서를 포함하여 서점가에서 널리 팔리고 있는 대한민국 역사에 관한 책들은 해방 후 통일 민족국가가 세워져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음에 대한 아쉬움으로 첫 페이지를 열고 있음이 보통이다. 이 책은 그러한 통설적 시각에서 벗어나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할 때 그것을 어떤 무엇으로도 통합할 수는 없으며, 그 점에서 분단은 불가피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좌우합작의 유혹을 물리치고 자유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것은 훌륭한 선택이었다는 입장이다. 한국인의 숙원인 민족통일은 그 새로운 나라가, 곧 대한민국이 이룩해야 할 장래의 과제로 미루어진 것이다.

또 기존의 통설과 달리 이 책은 새로운 이념에 의해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데에는 시간을 두고서 단계적으로 성취해 가지 않으면 안 될 수많은 과제가 있다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것을 두고 ‘나라만들기’라고 하였다. 이 책의 키워드는 ‘나라만들기’이다. 민주주의, 경제발전, 복지국가를 한꺼번에 이룰 수는 없는 법이다. 선진국의 역사를 살펴도 그러했으며, 조금만 차분히 생각해 봐도 그 점은 금방 이해할 수 있다.

나라만들기에는 합리적인 계획과 건강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이를 두고 인간들은 갈등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지난 60년 역사가 온통 그러하였다. 그렇지만 그런대로 볼만한 ‘나라만들기’의 역사였음은 심한 갈등 속에서도 그러한 조건이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역사에서 빚어진 온갖 허물과 희생에 눈을 감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책은 이 나라가 얼마나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허둥지둥 만들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피했으면 좋을 큰 상처를 안게 되었는지 몇 차례나 강조하였다. 대한민국은 상처투성이의 나라로 출발하였다.

이 책은 1988년부터의 민주화시대를 맞이하여 우리의 ‘나라만들기’ 역사가 일단락을 지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어디까지 일단락이다. 완성된 것은 아니다. 이 나라가 차라리 생겨나지 말았으면 좋았다는 역사관이 오히려 그 때부터 널리 확산되어 한동안 군림하였다. 이 점을 고려하면 어디까지나 겉이레만의 일단락이다. 어느 나라가 자신의 출생 기원과 성장과정에 대해 국민들이 애국심으로 공감할 역사를 쓸 수 없다면, 아니 쓸 의지가 없다면, 그 나라의 장래에 무슨 볼만한 점이 있겠는가.

그러한 위기의식에 이 책을 쓰게 된 데에는 두 가지 계기가 있었다. 몇 년 전부터 틈나는 대로 장병들의 정신교육에 참가해 왔는데, 장병들이 읽을 만한 대한민국 역사책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김문수 경기지사의 권유는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로서 직접적이었다. 도의 공무원들과 토론해 보면 이 나라의 역사에 대해 너무 알지 못한다는 것이 김지사의 걱정이다. 정치가의 역사에 대한 발언이 정치적 지지로 연결되는 경우는 드물다. 대중의 역사의식이 심하게 분열된 상태에서는 오히려 반발이 커서 손해를 보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김 지사의 역사에 대한 발언은 뜨겁다. 그는 정치가이기 이전에 도를 추구하는 정직한 지식인이다. 그가 즐겨 인용하듯이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은 법이다

이 책을 쓰는데 많은 도움을 주신 김학준 동아일보사 회장, 기무라 칸, 주익종 박사, 최상오 박사, 안병직,이대근,류근일,류석춘,양동안,강규형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60개의 문헌을 참고하였다.







(여기서는 제 1장 대한민국 역사를 위한 올바른 관점에 대해서만 옮김)







1.국민이 공유하는 역사가 없다.



정치가 안정되고 사회가 통합된 선진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의 특징은 국민 대다수가 공유하는 국가의 역사가 건전하게 성립해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의 역사를 공유하는 일은 그 국가에 속한 인간들을 하나의 국민으로 통합하는 기초적인 요건의 하나이다. 그래서 선진국으로 갈수록 정부는 그의 자라나는 세대에게 나라의 기초 이념이 무엇인지, 왜 그것이 정정당당한 것인지, 그것이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 어떠한 정치세력이 그 이념을 받들어 국가를 세웠는지에 대한 역사교육을 중시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그러한 교육을 받은 선진국의 국민은 대개 애국적이다. 자기가 소속한 국가가 정당한 이념에 기초하여 세워진 훌륭한 정치체제이며 그에 의해 자기와 가족의 행복이 보장되고 있음을 이해하고 그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선진국의 국민은 국가가 위기에 처하여 그를 부를 때 주저하지 않고 몸을 던져 전장에 나아간다.

우리 대한민국은 어떠한 형평인가.국민의 대다수가 공유하는 국가의 역사가 있는가. 2011년 한국청소년미래리더연합이랑 단체가 전국 400개 중고등학생 2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만약 전쟁이 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질문에 참전한다는 대답은 296명에 불과하였다. 반면 해외로 도피한다는 대답이 892명이 되었다.

한국의 청소년들이 애국적이지 않은 것은 그들의 책임이 아니다.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나아가 교육정책을 맡은 정부 당국이 국민의 의무를 소중하게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선생님이나 정부 당국이나, 나아가 대한민국의 국민 모두가 그리 큰 애국심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이같은 지적에 대해 독자 여러분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 한국인만큼 애국적인 국민이 어디 있는가. 2002년 월드컵 때를 돌이켜 보라. 수십만의 인파가 거리를 메우고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열렬이 응원하지 않았던가.

다른 나라와 축구시합을 할 때 제 나라를 응원하는 것은 애국심이라기보다 민족감정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애국심은 나라의 기초 이념과 역사에 대한 이해, 동의, 자발적 헌신에 기초해 성립하는 국민적 연대감 혹은 도덕적 책무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이 그러한 수준의 애국심에서 선진국의 국민보다 취약한 것은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예컨대 동서대학교의 마이어스 교수는 2010년에 발생한 천안함 사건에 대해 한국의 대학생들이 보인 반응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북한의 기습 공격으로 폭침한 그 군함에는 동서대 학생 한명이 수병으로 근무하다가 전사하였다. 그럼에도 그 사건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동대학의 학생은 없었다. 분노는 커녕 무시할 수 없는 수의 많은 학생들은 이명박 정부가 사건을 조작하였다는 음모설을 지지하였다.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글에서 마이어스 교수는 2002년 여중생 두 명이 훈련 중인 미국군의 장갑차에 치여 죽은 사고를 상기시켰다. 당시 온 나라가 두 여중생을 추모하고 미국을 비난하는 촛불로 밤거리를 덮었다. 그처럼 흥분하던 한국인이 천안함 폭침으로 46명이나 전사했는데도 전혀 분노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마이어스 교수는 한국인에게 ‘국가이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진단하였다.

국민 모두가 애국심으로 공유하는 국가의 역사가 아직 성립해 있지 않은 실정이다. 기성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줄 역사가 없다. 마이어스 교수의 표현 그대로 ‘국가이성; 결여되어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외부로부터 예상치 못한 큰 충격이 가해지면 정치와 사회가 크게 분열하여 국가체제가 사상누각처럼 허물어 내릴 수도 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 자랑스럽게 공유할 역사를 새롭게 쓸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쓰이고 가르쳐진 대한민국의 역사는 이 나라가 세워지고 발전해 온 역사를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역사가 오히려 국민을 분열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런 분열의 역사가 아니라 통합의 역사를 새롭게 쓸 필요가 있다. 관점을 달리하면 그 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새롭게 볼 수가 있다. 그 관점은 어더한 것들일까. 먼저 그에 대해 생각해보자.










2.사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이해해야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과거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미 지나간 사건이기 때문에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무슨 일이 실제로 벌어졌는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두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경우를 우리는 자주 접하고 있다. 과거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심지어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두고서도 서로 다른 해석으로 다투고 심지어 재판정으로까지 가기도 한다. 한 마디로 말해 모든 사람이 누구나 수긍하는 객관적인 진리는 현실에도 과거에도 없다.

그래서 영국의 역사학자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그에 대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의 해석이라는 뜻이다. 같은 사건을 두구소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의 관점이나 문제의식이 다르면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역사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이 특정한 관점에서 끊임없이 재해석하는 과거사의 흐름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두고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예컨대 625전쟁을 두고 공산주의 세력의 무력 침략으로부터 한국인이 자유와 인권을 방어한 전쟁이었다고도 할 수 있으며, 미국의 식민지로 있는 남한을 해방하기 위해 북한이 벌인 민족해방전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또 없었으면 좋았을 동족상잔의 슬픈 전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몇 년 전에 625전쟁에 대한 이 같은 해석의 차이를 둘러싸고 한국의 정치가 시끄러웠던 것을 독자 여러분은 기억할 것이다. 그것은 625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자유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다른 사람은 공산주의의 관점에서, 또 다른 사람은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625전쟁을 위와 같이 달리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면, 다시 말해 보는 관점에 따라 역사의 해석이 달라진다면, 역사를 두고 과학이라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역사는 과학이며 과학이지 않으면 안된다. 누구나 함부로 제 하고 싶은 대로 대화를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역사라고 할 수 없다. 이 점에 대해 깊이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실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에 관해 남겨진 문서,신문,잡지,편지,일기,녹취록 등 수많은 자료를 꼼곰하게 읽고 검토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법이다. 그것을 읽고 검토하는 직업이 바로 역사학이다. 역사가는 역사가 남겨 놓은 수많은 자료를 통해서 사실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직업인이다. 그런 작업에 종사한 적이 없는 사람이 제멋대로 해석만 일삼는다면 진정한 역사가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역사가들이 사료를 통해 무엇을 밝혀 놓았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역사를 즐겨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아무리 훌륭한 정치가라도, 아무리 성공한 기업가라도 그런 사람을 두고 올바른 자세의 교양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조건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과학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다시 624전쟁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그 전쟁이 왜 일어났는가에 관해 1980년대까지 미국이 북한과 소련의 남침을 유도하였다는 설이 그럴듯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든 적이 있다. 미국에서 진보적이라는 학자들이 미국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 그런 설을 만들어 냈다. 한국 학자들도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1991년 소련연방이 해체되고 모스ㅡ바의 공문서관이 개방되자 스탈린이 작성한 여러 문서가 공개되었다. 그에 따르면 625전쟁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미리 세밀하게 준비된 전쟁이었다. 스탈린의 문서를 읽으면 누구나 그점을 금방 알 수 있다. 유엔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가지고 있는 소련이 무엇 때문에 한국에 유엔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하는 유엔 안보리 회의에 불참했는지도 오랫동안 그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스탈린의 문서 속에 그에 대한 해답이 명쾌하게 담겨 있었다. 스탈린의 문서가 공개되자 미국이 북한과 소련의 남침을 유도하였다는 학설이 쑥 들어가고 말았다. 이 같은 예로부터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첫걸음은 자료에 바탕을 둔 과학하는 자세임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다.

그런데 과학하는 자세도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정치가 역사에 개입하여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북한의 역사책을 보면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될 당시 위대한 김일성 장군이 조선인민혁명군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북한으로 진격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그야말로 순전한 날조이다. 김일성과 그의 약 60여명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부대는 1941년부터 소련군의 보호하에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에 있었다. 김일성이 북한으로 들어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1945년 9월 중순이었다. 김일성과 그의 일행은 소련 군함을 타고 원산항으로 입항하였다. 이처럼 힘 있는 정치가가 사실을 왜곡하거나 조작하고자 할 때 힘 없는 일개 역사가가 죽기를 각오하지 않는다면 그에 저항하기 힘들다. 그렇게 날조된 역사를 두고 과학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그 같이 노골적인 왜곡이나 날조를 찾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사실에 대한 이해가 불완전하거나 잘못 이해된 사실을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근대과학의 역사가 일천하여 여전히 과학하는 자세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1945년 8월 15일의 사건을 예로 설명해 보자. 그 날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 억악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런데 많은 한국인들은 그날 우리 민족이 독립을 했다고 알고 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독립의 뜻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실제 우리민족은 그날부터 3년간 미군정의 지배를 받았다. 이 땅에서 일본을 몰아낸 것은 미국이었다. 그 미국이 일본제국주의를 완전히 해체할 요량으로 1910년부터 그의 부속영토로 지배되어 온 한반도 남부에 군대를 상륙시킨 것이다. 한국인이 새로운 점령세력인 미군정으로부터도 해방되어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세우는 것은 1948년 8월 15일이었다. 그때서야 진정한 독립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기록을 읽으면 누구나 그 점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는 원래 1947년 3.1절을 맞이 하여 “우리의 소원은 독립”으로 지어진 것이다. 독립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란이 발생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과학하는 자세의 결여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자료를 세밀히 읽고 검토하여 사실이 원래 어떠했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 같은 혼란이 발생한 것이다. 특정 관점에 깊이 매몰되면 과학하는 자세에 장애가 생긴다. 그래서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과학하는 자세와 더불어 다음고 k같은 몇 가지 역사관에 대해 깊이 고찰할 필요가 있다.











3.민족주의는 우리의 소중한 공동체 정서



과학하는 자세에 충실히 입각하여 언제 어떤 사실이 어떻게 벌어졌는지에 대해 의견을 같이 하더라도 역사관에 따라 그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로 달라질 수 있다. 앞서 소개한 625전쟁에 대해 세 가지 해석이 그 좋은 예이다. 625전쟁이 북한에 의한 남침이라 해도 북한과 그에 동조하는 세력은 민족해방을 위한 정의의 전쟁이었다는 주장을 접지 않는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오늘날의 한국인은 그들의 역사를 두고 서로 다른 해석으로 심하게 대립하고 있다. 625전쟁만이 아니다. 앞서 잠시 소개한 대한민국의 건국일도 그렇다. 어떤 사람은 1948년 8월 15일에 이 나라가 세워졌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사람은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진 날이 대한민국의 건국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 두 대통령의 역사적 평가도 마찬가지다. 이 두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사람들은 찬반양론의 두 패로 나뉘어 얼굴을 붉힌다. 독자 여러분도 적어도 한두 번은 그런 체험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앞서 지적한대로 오늘날 한국인이 흔쾌히 공유하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없다고 할 형평이다. 서점에 가면 몇몇 잘 알려진 책들이 있기는 하지만 너무 심하게 대한민국의 역사를 비판하고 있어서 자라나는 세대에게 권장하기 힘들 정도이다. 군도 마찬가지 고민을 하고 있다. 중대 단위마다 도서실이 있고 수백 권의 책이 있지만, 대한민국의 역사에 관한 책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심하게 매도한 책들을 들여 놓을 수도 없다. 그렇게 잘못된 나라라면 그 나라를 위해 장병들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전쟁을 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대한민국의 역사를 새롭게 다시 이해함에 필요한 역사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자.한국인에게 가장 익숙한, 널리 수용되고 있는 역사관은 두말할 것도 없이 민족주의이다. 민족이란 한 마디로 우리 한국인은 모두 단군 할아버지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해 민족이란 한 핏줄이라는 혈연에 바탕을 둔 운명공동체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만큼 인종이 동질적인 집단은 세계에서도 드물다. 이 같은 인종적 동질성이 한국의 유달리 강한 민족주의를 낳았다고 한다.

민족주의는 한국인의 소중한 정신문화이다. 민족주의는 대한민국의 강한 국민적 통합의 바탕으로 작용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를 당하여 한국경제가 국제통화기금의 감독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온 국민이 집집마다 가지고 있는 금붙이를 내놓아 상당한 액수의 달러를 마련한 적이 있다. 당시 국난을 당하여 금을 모으는 한국인의 모습은 세계의 여러나라에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이런 나라는 세계에서도 드물다. 최근 남유럽 국가들이 재정위기를 당하여 1997년의 한국과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국민들이 정부의 정책에 협조하기는 커녕 격렬한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래서 위기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그런 나라들에 비한다면 한국의 국민적 통합은 매우 높은 수준이다. 그 밑바탕에는 우리 모두 형제자매라는 민족주의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민족주의는 강한 펴등의식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한국인만큼 평등의식이 강한 국민도 세상에 없다고 한다. 그것은 모두 다 형제자매인데 누구는 잘 살고 누구는 못 살아서 되겠는가라는 공동체 의식 때문이다. 남북통일과 민족주의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민족 통일을 간절히 바란다. 왜 그런가. 그 역시 우리 모두는 원래 한 가족이었는데 본의 아니게 갈라졌다는 민족의식이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에서 민족주의는 한국인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소중한 정신문화라고 할 수 있다. 민족주의를 소중히 간직하고 북돋워 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점은 민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은 어디까지나 감성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한국의 축구팀이 월드컵에서 일본과 시합을 할 때 온 나라가 더들썩 하게 응원을 벌인다. 시비곡절이나 이해득실을 따져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어릴 때부터 그러한 의식과 행동양식을 부모 세대로부터 주입받아 왔기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민족이라는 것은 인간 사회가 세대 간에 자연스럽게 물리고 계승하는 집단적 감성의 범주라고 할 수 있다.

민족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이성의 영역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 때문에 민족이라는 집단적 감성은 자칫하면 오도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인간은 이성의 동물만이 아니라 감성의 동물이기도 하다. 경우에 따라 분별력을 잃고 다른 사람에게 좋고 싫은 감정을 마구 드러내기도 한다. 민족이라는 집단감성이 정치가의 선동으로 잘못 오용된 경우를 우리는 세계사에서 흔하게 찾을 수 있다. 우리 아리안족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종족이라고 믿었던 나치체제 독일인들, 우리는 신의 민족이라고 하면서 이웃나라를 침략했던 천황제 하의 일본인들이 그 좋은 예이다.





민족이 감성의 범주이기 때문에 정치적 상황에 따라 그 역할이 달라지는 예를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훌륭하게 찾을 수 있다. 해방 후 미국,영국,소련이 한국을 신탁통치 하겠다는 모스크바협정을 발표하자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우익세력은 반대를,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좌익세력은 찬성을 하였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우익과 좌익의 투쟁에서 우익이 승리하였다. 다수 한국인의 민족의식이 신탁통치를 반대하여 우익을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우익을 가리켜 민족진영이라고도 하였다. 그 전까지만 해도 좌익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이 우익보다 강하였다. 그런데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통해서 우익이 좌익보다 더욱 강해졌다. 그만큼 집단적 감성의 범주로서 민족의 힘이 컸던 것이다.

그런데 1980년대가 되어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다른 세력이 민족의 힘을 장악하였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그 계기였다. 당시 광주에서 유혈참극이 벌어진 데에는 미국의 책임이 크다는 주장이 널리 확산되었다. 그와 동시에 대한민국은 여전히 미국의 식민지라는 주장이 다시 제기되었다. 대한민국은 반민족세력이 잘못 세운 나라라는 이해가 역사학계의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하였다.

앞서 잠시 언급한대로 2002년 훈련 도중의 미국군 장갑차에 치여 두명의 여중생이 사망하자 그에 항의하여 대규모 촛불 시위가 일었다. 그것은 교통사고였다. 고의적인 살인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수만 명의 한국인이 밤거리에 촛불을 들고 모였음은 미 제국주의의 압제로 억울하게 희생된 꽃다운 소녀의 목숨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당시 촛불시위를 이끌었던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대중을 선동하였다. 이 사건도 민족주의 감정이 정치적으로 오용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이렇게 상황에 따라 그 역할을 바꾸는 민족에 대해 지난 10년간 한국의 역사가들은 종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많이 밝혀냈다. 한국인들이 민족이란 의식을 갖게 된 것은 20세기 초 조선왕조가 멸망의 위기에 처하면서부터라고 한다. 민족이란 말 자체가 1907년경에 일본에서 수입되었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그와 같은 뜻의 말이 없었다. 19세기까지 조선왕조의 인간들은 양반, 상민, 노비의 신분으로 나뉘었다. 노비, 곧 종은 양반에 의해 사고 팔리는 재산이었다. 17세기에는 노비가 전체 인구의 3~4할에 달하기도 하였는데 19세기까지도 다 없어지지 않고 1할 전후를 차지하였다. 일반 상민도, 쉽게 말해 상놈도 양반에 의해 심한 차별을 받았다. 그렇게 신분 차별이 심했던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형제자매라는 공동체 의식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한 공동체 의식은 한국인 모두가 일제로부터 차별을 받으면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는 단군의 자손이라는 사상이 생겨났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의 조상으로 추앙된 것은 단군이 아니라 중국에서 건너온 기자(箕子)였다.

이러한 사실들이 여러 자료에서 분명해지자 민족이 영원불변의 존재인 줄 알았던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대중의 선입관념에 맞서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역사학의 위대한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이 불과 100년 전부터 생겨난 것이라면 그것은 역사와 함께 변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 민족의 역할이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바뀌는 예를 소개 하였는데, 그것은 민족이란 집단감성의 범주과 특정시대에 생겨나서 그 내용이 차츰 바뀌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역사와 함께 민족의 내용이 바뀌는 더없이 좋은 실례를 북한에서 찾을 수 있다. 북한정권은 1998년에 개정된 헌법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민족의 태양이시며 조국통일의 구성이시다”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북한에서 민족이라 하면 ‘김일성민족’으로 그 뜻이 바뀌었다. 그것은 같은 민족이라 하지만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 남한과 북한의 사람들이 만나 좋은 뜻으로 우리민족끼리를 함께 외치지만 막상 내용을 알고 보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음이 밝혀져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상과 같이 한국인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역사관인 민족주의는 지난 20세기에 생겨난 한국인의 집단감성으로서 정치적 상황에 따라 그 내용과 역할이 바뀌어 왔다. 우리는 민족주의라는 공통체의식을 우리의 소중한 정신문화로 간직하고 북돋워갈 필요가 있다. 동시에 민족주의가 발휘할 수 있는, 누구도 제어하기 힘든 무시무시한 힘이 잘못된 이념에 의해 오용되지 않도록 늘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4. 자유 이념은 역사 발전의 근본 동력



민족주의와 더불어 또 하나의 소중한 역사관을 들자면 자유의 이념이다.민족주의가 감성의 영역이라면 자유 이념은 이성의 영역이다. 이 둘은 서로 보조를 맞추며 함께 나아갈 필요가 있다. 이성의 자유 이념이 앞장서고 감성의 민족주의가 뒤를 밀면서 함께 나아가야 한다. 자유 이념이 앞장서지 않으면, 민족주의만으로는 그것이 어디로 갈지 모르기 때문에 위험하다. 자유 이념은 우리가 대한민국의 역사를 올바로 해석함에 있어서 다른 무엇보다 소중한 역사관이라고 하겠다.

민족과 마찬가지로 자유 이념 역시 특정 시대에 발견되었다. 그것을 발견하고 국가의 기초 이념으로까지 발전시킨 것은 16~18세기의 서유럽 문명이다. 서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은 인간은 원래 하나님에 의해 자유로운 개체로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인간은 원래 자유의 존재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신체를 소유하거나 억압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과 신체를 보전하기 위해 자연에 노동을 가하여 재화를 생산하다. 그 재화는 노동을 한 당사자의 고유한 권리로서 재산이다. 왜냐하면 노동을 하는 인간의 신체가 자유일 분 아니라 노동의 대상인 자연이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자유를 마음껏 추구하면 혼란이 발생한다. 그래서 인간은 서로 계약을 맺어 자신의 자유를 조금씩 양보하여 사회의 질서를 바로 잡는 정부를 세웠다. 그 정부가 인간의 신체를 함부로 구속하거 나 재산을 빼앗을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러한 정부를 타도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이러한 계몽주의 정치철학에 입각하여 최초로 건설된 국가가 미국이다. 1776년의 미국 독립선언서는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의 행동의 추구가 있다”라는 유명한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 같은 자유 이념은 뒤이어 1789년 프랑스혁명을 일으키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이후 자유의 이념은 20세기 전반까지 세차례의 큰 파동을 그리면서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헌법도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지닌다”고 선언하고 있는데(제10조), 그 역사적 기원은 위와 같은 서유럽과 미국의 계몽주의 정치철학에 있다고 하겠다.





한국을 위시한 동아시아의 문명은 오랫동안 유교의 정치철학에 의해 통합되어 왔다. 유교의 정치철학에는 위와 같은 자유의 이념이 없었다. 동아시아에서 자유의 이념은 서유럽에서 전파되어 온 것이다. 한국에서는 1870~1890년대에 활동한 김옥균,박영효,서재필등의 개화파 인사들이 자유 이념을 최초로 받아들였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1894년 감오경장으로 과거제가 폐지되자 배재학당에 들어가 서양 학문을 공부하였다. 거기서 그는 자유 이념을 알게 되었으며, 이후 평생에 걸쳐 그것을 정치적 신조로 삼았다.

16~18세기 서유럽에서 성립한 자유 이념이 전 세계로 퍼져간 것은 그것이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자연적 질서에 가장 적합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서유럽의 자유이념은 하나님의 인간을 창조하였다는 등, 기독교 신앙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자유 이념은 기독교 문명권을 넘어 전 세계의 상이한 문명권으로 널리 전파되고 수용되었다. 그것은 자유가 경험적으로 인간의 본성에 가장 적합하고 또 사회의 발전을 이끄는 가장 우수한 원리이기 때문이다.

스미스를 비롯한 최초의 경제학자들이 그 점을 훌륭하게 증명하였다. 진화론적 생물학을 선두로 하는 현대의 자연,사회과학은 수많은 실험을 반복하면서 그 점을 과학적으로 입증하였다. 그들이 던지는 공통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즉 인간들은 서로 자발적으로 협력하고 소통할 때 그들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역사는 지식의 축적과 함께 발전한다. 새로운 지식이 나타나지 않으면 역사는 정체한다. 인간의 행복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을 보다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새로운 지식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지식을 개발하고 교환하고 또 모방하는 자유가 주어져 지식의 축적이 순조로운 사회는 발전해 가고 인간의 삶도 보다 윤택해진다.

지식은 어느 천재가 개발하는 것만이 아니다. 지식은 수많은 사람에 의해 분산적으로 개발되며 서로 소통함으로써 널리 확산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인간은 그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무식한 존재이다. 그런 인간들이 일상의 생활 속에서, 자연과의 노동과정에서, 전통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조금씩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고 암묵적인 형태로 축적해 간다. 예컨대 어느 가구를 짜는 데 들어가는 재목의 결을 그 일에 오랫동안 종사한 목수가 가장 잘 아는 법이다. 아인슈타인과 같은 천재적인 물리학자라 해도 그에 관한 한 그 목수를 당할 수 없다.

지식의 속성이 이와 같기 때문에 인간들은 그의 오랜 역사에서 지식을 소통하고 교환함으로서 서로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현대 인류학은 인간이 유인원(類人猿)과 결정적으로 구분되는 것은 교환의 유리함을 이해하는 지성의 능력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쨌든 인간 사회는 지식의 자연발생적이고 진화적인 교환과 소통의 체계와 더불어 발전해왔다. 그 교환과 소통의 경제적 체계가 다른 아닌 시장 또는 교역이다.

시장에서 벌어지는 가격의 움직임은 어느 누구의 지식이 옳고 그른지를 자연스럽게 판별해준다. 사람들은 그에 맞추어 무엇을 얼마나 생산할지를 결정한다. 그가 올바로 판단하였는지는 시장에서의 교환을 통해 증명된다. 시장은 완벽하지 않다. 수요와 공급은 꼭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오랜 관습에 비추어 그 차이가 조만간 조정되는 오차의 범위에 불과함을 알고 있다. 이러한 협력과 소통의 체계로서 시장이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런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시장은 성립하지 않거나 불완전하게 성립할 뿐이다. 자유의 기초는 재산권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은 그에 따른 결과가 오로지 자신의 권리에 속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믿음이 없다면, 다시 말해 재산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행동하려 하지 않으면, 그에 따라 시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지난 20세기에 시도된 공산주의혁명은 이 같이 인류가 오랜 문명사에서 체득하고 실천해 온 평범한 진리를 무시하고 억압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인간 이성의 합리성, 그 완전성을 신봉하였다. 특히 혁명을 지도하는 공산당의 지성을 신뢰하였다. 당은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들은 정부가 시장을 대신하여 필요한 만큼 생산하고 분배하는 계획경제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들은 계획을 수립함에 필요한 지식이 완벽하게 수집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수집한 지식은 불완전하거나 왜곡된 것이었다. 보통사람들이 그의 고유한 환경과 전통 속에서 축적해 온 모든 유용한 지식은 억압되거나 폐기되었다. 공산주의 혁명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엉터리 정보로 계획을 짜니 낭비와 부족과 비효율이 생길 뿐이었다.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는, 이간 이성의 합리성을 과신했던 공산주의체제는 결국 한 세기도 넘기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보통사람들의 자발적인 협력과 소통의 체계로서 시장을 대신할 다른 것은 없었다. 그 점이 공산주의 체제의 해체와 더불어 더 없이 명확해졌다. 이를 두고 미국의 사회학자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이라고까지 말하였다. 역사의 발전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 역사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인지를 이제야 어느 정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를 두고 역사의 결과론적 해석이라 해서는 곤란하다. 인간은 원래 무식한 존재이며 수많은 시행착오와 더불어 조금씩 그 지혜를 발전시켜 간다. 공산주의혁명의 실패는 그러한 지혜를 인류사회에 선사하였다. 그러한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후큐야마의 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가능해진다. 역사의 진정한 발전은 타협적이며 개량적이며 점진적이며 진화적인 경로로 이루어진다. 단절적이며 파괴적인 혁명은 역사의 정상적인 발전이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를 발전시키는 유용한 지식은 보통사람의 노동과정과 전통적 인간관계 속에 암묵적인 형태로 축적되기 때문이다. 흔히들 기존의 국가체제를 대려 부수는 혁명이야 말로 역사의 진정한 발전인 줄 알지만 커다란 오해이다. 따지고 보면 성공한 혁명의 예는 거의 없는 편이다. 20세기의 공산주의 혁명은 소련에서,중국에서,북한에서 모든 지역에서 실패하였다.

인간의 의지로 기성의 국가체제를 때려 부순 대표적인 혁명이 1798년의 프랑스혁명이다. 현대의 역사학은 그 혁명도 실패작이었다고 평가한다. 프랑스혁명이 초래한 것은 장기간의 좀처럼 수습되지 않는 혼란뿐이었다. 프랑스의 황제체제는 다시 복구되었으며, 프랑스의 민주주의는 19세기 내내 표류하였으며, 프랑스의 산업혁명은 한참 지체되었다. 역사의 진정한 발전은 인간들이 기성체제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타협하고 개량하는 지혜를 발휘할 때 이루어졌다. 파괴적인 혁명을 결과하지 않는 영국이 그 모범 사례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의 기성의 사회체제를 때려 부수지 않고 좋은 점은 계승하고 나쁜 점을 버리는 개량적인 방식으로 세워진 나라이다. 예컨대 건국 초기 대한민국은 이전의 총독부와 미군정이 제정한 법률을 계승하였다. 일제가 한국을 지배하기 위해 구축한 시장경제 체제는 그대로 온존되었다. 좋은 것은 비록 그것이 제국주의가 만든 것이라도 활용할 줄 아는 지혜가 결국 역사를 발전시켰다.

혹자는 일제의 통치기구과 사회체제를 혁명적으로 폐기하지 않았다고 대한민국을 비판한다. 대한민국을 두고 반민족세력에 의해 잘못 세워진 나라라는 이해가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다. 그렇지만 기존의 사회체제를 혁명적으로 때려 부술 때 어떠한 결과가 발생하는지는 북한의 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지주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고향해서 추방하였다. 일제가 만든 법과 모든 통치기구를 폐기하였다. 그랬더니 그 법과 제도에 실려 있는 근대문명마저 죄다 폐기되고 말았다. 그 법과 제도가 보장한 자유 이념이 계급의 적으로 몰려 추방되었다. 그에 따라 보통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협력하고 소통 할 수 있는 역사 발전의 장이 닫히고 말았다. 이후 60년간 북한은 정체와 후퇴의 역사를 걸을 수 밖에 없었다. 반면 기존의 사회체제를 온건하게 타협적으로 개량한 대한민국은 번영에 번영을 거듭하여 오늘날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선진국 반열에 진입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민총생산은 북한을 40배나 능가하며, 그동안 축적된 국부의 차이는 수백 배에 달한다.

요컨대 자유 이념에서 바라 본 역사의 발전은 타협적이며 개량적이며 점지적이며 진화적이다. 지난 20세기의 세계사를 성찰하면서 이 점을 솔직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 어둡고 부정적이고 정체적으로 비쳐진 대한민국의 역사가 밝게 긍정적으로 달리 해석된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그렇게 재해석된 우리의 역사를 만나게 될 것이다.










5. 나라만들기라는 새로운 관점



대한민국의 역사를 새롭게 재해석하기 위해 필요한 역사관을 한가지 더 소개 한다. 그것은 지난 60년간의 대한민국 역사를 나라만들기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자는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은1945년 8월 우리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것을 두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가 나치 독일의 점령으로부터 해방된 것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나치의 프랑스 점령은 고작 4년이다. 그에 따라 나치가 물러난 뒤 프랑스는 이전의 국가와 사회체제를 그대로 회복하였다. 나치의 군사적 점령이 프랑스의 국가와 사회를 바꾸어 놓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두나라 다 일찍부터 근대화된 나라였다.

그에 비하자면 일제의 한국 지배는 1905년부터 치면 40년이나 되었다. 일제가 물러간 뒤 한국인들은 이전의 왕조체제의 국가와 사회를 회복하지 않았다. 회복하려 해도 할 수가 없었다. 일제 하의 40년간 사회가 완전히 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물리적으로 억압되고 있다가 원상회복된 것이 아니라 화학적인 작용을 받아 다른 형질로 바뀌어 버린것이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한국 사회를 그렇게 바꾸었다. 일제는 한국을 영구히 그의 영토로 병합할 야욕을 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을 일본과 동질의 사회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일본에서 시행되고 있는 법과 제도를 그대로 옮겨 심었다. 사유재산제도를 보장하는 민법도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야 일본인들이 한국에 건너와 땅도 사고 공장도 짓고 광산도 개발하여 한국인을 소작농으로 노동자로 광부로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제는 한국인의 정치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세금만 걷었지 투표권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경제적 자유는 인정하였다. 그래야 일본인 지주와 계약을 맺어 소작농이 될수 잇기 때문이다. 그래야 일본인 공장의 노동자로, 일본인 광산의 광부로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반쪽의 자유로서 종속될 자유에 불과하였다.

그렇지만 그런 식의 지배를 40년이나 받은 가운데 사회가 질적으로 변하고 말았다. 변화의 자생적인 출발은 19세기 후반부터였는데, 식민지기에 걸쳐 그러한 변화가 지속되었다. 자유재산제도와 시장경제체제가 성립하니까 한국인 자본가와 공장도 생겨나기 시작하여 1930년대가 되면 그 수가 일본인보다 많아졌다. 일제는 한국을 도오하시킬 목적으로 학교를 세웠지만,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한국인 가운데서도 근대 교육을 받은 기업가,상인,엔지니어,변호사,의사,교사,숙련노동자,하급관료 등의 전문가 집단이 생겨났다. 이들은 일제에 동화되기는커녕 민족의식에 강하게 눈을 떴다. 이들은 언젠가 그들의 조국이 회복되면 근대국가를 세우는 일꾼으로서 역할을 할 참이었다.

요컨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거치는 동안 한국사회는 슬슬 근대문명의 사회로 바뀌어갔다. 일본 역시 서유럽으로부터 근대문명을 받아들인 국가이다. 그 근대문명의 법과 제도가 일본의 지배를 통해 한국으로 이식되었다. 근대문명의 핵심요소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이다. 식민지라는 종속적이며 왜곡된 환경에서도 그러한 문명의 요소는 이식되고 확산되었다. 대한민국은 그러한 문명사의 대전환 과정에서 생겨난 국가이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라는 새로운 문명의 원리에 입각하여 새로운 국가가 세워진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문명의 원래에 입각하여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새로운 나라르 세우는 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같다. 우선 국가의 기초 이념을 공고하게 다져야 했다. 그래야 다른 이념을 가진 내외의 적대적 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제대로 방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통령중심제인지 내각책임제인지 정부의 형태를 빨리 결정하고 정착시켜야 했다. 그래야 국내 정치가 안정되기 때문이다. 뒤이어 청렴하고 유능한 직업적 관료제를 양성해야 했다. 외적의 무력 침입을 맞아 나라를 지킬 튼튼한 상비군을 육성함은 다른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경제개발을 조속히 추진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세금이 제대로 걷혀 관료와 군인들에게 충분한 봉급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정부재정을 확충하여 사회적 약자에게 최소 수준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복지제도를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기초적 조건들이 어느정도 갖춰지는 단계가 되어서야 국가에 대해 자발적인 귀속감을 느끼는 애국적인 국민이 생겨난다고 하겠다. 흔히들 국민이 먼저 생긴 다음 국가가 생기는 줄 알지마 정반대이다. 소수의 창조적이며 선조적인 정치세력에 의해 국가가 먼저 생겨난 한참 뒤에 그에 충실한 국민이 생겨나는 법이다. 새로운 국가는 건국을 선포한 다음 이 같은 여러 조건을 충족하게 될 대 비로소 온전하게 만들어졌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이 같은 나라만들기의 과제들을 한꺼번에 동시다발로 해결할 수는 없다. 신생 후진국이 보유하는 인적 물적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라만들기의 과제들은 짧아도 두어세대에 걸쳐 단계적으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 사이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투자하기 위해서는 여러 과제의 우선순위를 올바로 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잘못되면 낭비와 비효율이 발생하여 망쳐 버리게 된다.

그런데 우선순위를 정하면 순위가 뒬로 밀리는 분야로부터 저항이 발생하여 정치적 긴장이 조성된다. 그래서 나라만들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서 발생하기 마련인 정치적 긴장을 조정하고 해소할 수 있는 강력하고 유능한 올바른 방향의 정치적 리더십이 필수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60년대까지 수많은 국가들이 생겨났지만 나라만들기에 성공한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적지 않은 나라가 도중에 실패하여 적대세력에 의해 국가체제가 전복되고 말았다. 상당수의 국가는 일상적인 혼란, 부패, 빈곤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후진국이 보유한 인적 물적 자원이 빈약할 뿐 아니라, 강력하고 유능하고 올바른 방향의 정치적 리더십을 확보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건국도 마찬가지로 곤란한 과정을 거쳤다.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 독립을 서높한것은 1948년 8월 15일이었다. 이후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지는 데에는 대략 40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되는 그 시점에 이르러서야 대한민국은 경제성장도 이루고 민주주의도 정착하여 나라다운 나라가 만들어졌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 사이 수많은 시련이 있었다. 전쟁이 터졌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몇 차례의 폭력적인 정변도 겪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에는 다른 후진국과 달리 나라만들기에 적합한 인적 자본과 정치적 리더십의 조건이 충족되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국가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성취하는 모범사례를 이루었다.

다시 말해 건국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는 나라만들기의 과제를 단계적으로 합리적으로 성취해 가는 관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역사가의 전문적인 용어를 빌리면 수십 년의 단위로 변화를 보이는 ‘중기’(中期)의 시간으로 ‘국면’(局面)과 같은 것이다. 어느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국면’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건국 이후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온갖 사건은 한국인이 그들의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 있다는 ‘국면’에서 보아야 그 역사적 의미가 온전하게 이해될 수 있다.

처음부터 민주주의를 완전하게 실천할 수는 없었다. 그를 위한 기초적 조건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형태를 대통령중심제로 할 것이냐 내각책임제로 할 것이냐를 두고 건국 이후 13년간이나 심각한 정쟁이 있었다. 정부형태도 확정되지 않았는데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제대로 운용될 리 없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많은 역사가들은 처음부터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천하지 않았다고 해서 초창기의 정치 지도자들을 너무 심하게 매도해 왔다. 심지어 초창기의 대한민국을 두고 이것이 과연 나라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애당초 생겨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는 인식을 확산 시키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건국의 초창기에 대한민국이 범한 잘못을 모두 덮어서는 안된다. 건국을 전후하여 특히 625전쟁 중에 무고한 양민들이 군경에 의해 학살된 경우가 있었다. 그러한 인류의 양심에 반하는 범죄에 대해서는 끝까지 진상을 조사하여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보상을 행할 필교가 있다. 역사가의 값진 역할은 과거의 인간들이 범한 무지,교만,과오를 낱낱이 밝혀내 보다 나은 미래의 건설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게 하는 것이다. 역사가가 기득권 세력의 포로가 되어 그러한 역할에 주저한다면, 그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만큼이나 역사를 오도하는 잘못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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