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락(盤樂)은 음반(音盤) 토크쇼이다. 사라져버리고, 지워져 버린 우리 음반사를 정리하고, 그때 그 시절 음원을 찾아, 귀한 음악을 들려주고 이 음악에 담긴 역사와 함께한 사람들의 모습을 재조명 해준다.
한국문화재재단의 사업으로 한국문화의집(kous) 진옥섭 예술감독이 2010년에 국악음반사를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시작하여 2012년 한해만 거르고, 매년 우리 음반사 체계를 정립하신 금옥(金玉)같으신 분들을 모셔서 소중한 시간을 가져오고 있다.
지금까지 무대에 오르신 이보형, 양정환, 정창관, 배연형, 이규호, 노재명, 이진원, 최상일, 김호성, 김문성, 이준희, 박찬호(재일동포), 이분들이 계시지 않았으면 우리 음반사, 음원, 소리꾼과 가수가 역사 속에 묻혀버린 암흑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2016년 반락(盤樂), 사인사색(四人四色) 그 사람의 음반 이야기 첫 시작은 단국대학교 장유정교수의 ‘노래에미쳐 노래에 살다’ 1930년대 대중음악사 이었다. 가수가 꿈이었던 여자어린애가 어른이 되어 ‘대학가요제 예선’에서 떨어질 때 까지 무던히 노력을 하였지만 꿈을 접고, 노래를 연구하기 시작하여 2004년 ‘대중가요’로 박사가 되어,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2006년에 “오빠는 풍각쟁이야, 대중가요로 본 근대의 풍경” 책을 세상에 내놓으며 대중가요음악사를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리기 시작하였다.
무대 뒤 화면에 ‘1930년대 명가수 언파레드(0n Parade)' 장유정이 들려줄 반락 제목이 떴다. 공연을 마친 배우들이 무대 위에 죽 늘어선 모습을 표현한 ’언파레드‘가 당시 신문기사 등에서 가수들의 사진을 나열하고 그들의 신상 정보나 특징 등을 제공할 때 사용한 용어이다.
1930년대는 일제강점기 이었지만 ‘레코드 황금시기’라 불리어지듯 많은 음반, 노래, 가수가 나왔던 시기이었기에, 많은 이야깃거리를 가진 인기가수 중 본인이 듬뿍 애정을 주고 싶은 가수를 학사출신 가수, 기생출신 가수, 부부가수, 숨어있는 가수로 분류하여 선정한 10분의 노래와 이야기로 약 2시간을 가득 채워주고 남은 여운을 뒤풀이까지 가져갔다.
채규엽(蔡奎燁) - 1932년 콜롬비아사와 전속계약을 맺은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가수(職業歌手)이다. 1930년 자신이 작사, 작곡한 “유랑인의 노래”로 데뷔하여 1935년 매일신보에서 애독자 투표로 남자 가수 베스트 5 중 1위를 차지했다. 1934년에 발표한 “서울노래”는 원래 가사가 6절로 이루어졌으나 일제의 검열에 의해 2번의 개작을 거쳐 음반에 실렸다 한다.
박향림(朴響林) - 예명 ‘박정림’을 사용 1937년 “청춘극장”으로 데뷔 했다, 25세의 나이로 요절 했지만 ‘재즈송으로 조선 제일 가수가 되고 싶다.’ 포부를 밝혔고, 블루스 계열 노래 ‘희망블루스’ 만요 ‘오빠는 풍각쟁이’등 다양한 장르노래를 하였다.
왕수복(王壽福) - 기생출신 가수, 1933년에 데뷔 했고, 1934년 『삼천리』 주최 전조선 인기가수 투표 때 1등을 하였고, 조선 레코드계에서 있어 그녀의 대표곡 ‘고도의 정한’ 이상 팔린 것은 없다 할 정도로 전국에 이름을 날렸다.
선우일선(鮮于一扇) - 기생출신 가수, 가수가 되기 전에는 최창선(崔昌善)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나, 이 이름이 본명인지 기명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933년 ‘꽃을 잡고’로 데뷔하였고 당시 ‘사의 찬미’를 부른 윤심덕 이래 슬픔의 가수로 첫 손을 꼽힌다는 평을 들었다. 『삼천리』 주최 전조선 인기가수 투표 때 왕수복에 이어 2위를 하였다.
김해송(金海松) - 이난영의 남편으로 부부가수 이었다. 민요에서 재즈까지 가요의 전 영역을 노래하고 연주자, 작곡자, 작사가, 가수로 음악의 천재 이었다. 1935년 이 땅 젊은 층의 사랑을 받던 미국 팝송 “ 마이 블루 헤븐"(MyBlueHeaven)”을 우리말로 직접 취입해 발표했고, 이를 계기로 작곡가 ‘김송규’로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이난영(李蘭影) - 김해송이 남편으로 부부가수 이었다. 1933년 “향수”로 데뷔하여 1935년에 발표한 “목포의 눈물”은 그녀를 가요의 여왕으로 등극 시켰다. 1940년에 결성한 최초의 한국 걸 그룹 ‘저고리 씨스터’멤버였고, 60년대 초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활동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보컬그룹 김시스터즈를 결성 했다.
고복수(高福壽) - 황금심이 부인으로 부부가수 이었다. 콜럼비아사 주최 전선(全鮮) 아홉도시 콩쿠르대회의 부산대회에 출전해 1등으로 입상했고, 1932년 동아일보사의 후원 콜럼비아 레코드사 전국신인남녀가수 선발대회에서 3위로 입상하여 1934년 “ 이원애곡(梨園哀曲)과 타향살이 ”로 데뷔한 우리나라 최초 오디션 출신 직업가수 이다. 음악학원을 할 때 ‘이미자’등을 길러냈다.
황금심(黃琴心) - 고복수의 부인으로 부부가수 이었다. 본명은 황금동(黃金童), 다른 이름은 황금자로 1937년에 16살에 가요계에 데뷔하여 “알뜰한 당신”으로 스타가 되었다. 1961년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 ‘장희빈’을 불렀다.
임원(林園) - ‘목포의 눈물’ ‘타향살이’ 작고자인 손목인(孫牧人)의 가수로 노래 부를 때 이름이다. 본명은 손득렬(孫得烈)이며 가수로 예명은 손안드레, 임원(林園)이었고, 작곡자로는 또 다른 예명 양상포(梁想浦)를 쓰기도 했다, 1934년 ‘아침전주곡과 캐스팅시대’가 그의 작곡품으로 처음 레코드에 실렸고 손목인으로 2곡, 임원으로 6곡, 손안드레 6곡, 정도의 노래를 불렀다 한다,
최승희(崔承喜) - 1911년에 태어나 1969년에 세상을 떠나 한국 무용계의 전설 최승희 이다. 어릴적 최승희의 꿈은 가수 이었고 1936년 ‘이태리의 정원’ 음반을 남겨 꿈을 이루었다.
이분들이 남긴 옛 모습을 영상을 통해 확인하며, 옛 음반에서 들려오는 이분들의 노래를 듣고, 이 노래 가사를 통해 전해주는 그 시절 생활과 일상을 그렸으며, 장유정교수가 이야기하는 이분들의 삶과 1930년대의 가요 역사를 70여년이 지나 체험 할 수 있었던 행복을 함께 누리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마냥 부러움으로 남을 것이다.
이야기 사이사이 옛 음반의 노래를 그대로 복각한 것처럼 직접 노래를 불러주던 장유정 교수의 황홀한 표정이 눈에 선하고, 80고령의 한국 아코디언 대부 심성락 선생과 과거 레코드 음반 기타반주자로 이름이 빠지지 않았던 최춘호님이 감상하게 하여준 1930년대 생음악의 감동이 아직도 가슴을 벅차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