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음력 7월 15일 백중날 황해도 사리원(沙里院) 경암산 아래에서 봉산탈춤 놀이판이 벌어졌고 스웨덴 조류학자 ‘베리만’은 16mm 영상으로 촬영했다. 이때, 1998년에 타계한 민속학자 ‘임석재(任晳宰)’가 대사를 채록 하였고 훗날 ‘베리만 영상’ 일부를 입수 소장 하였다. 80년이 지난, 2016년 8월 31일 ‘한국문화재재단’은 이 영상을 공개하고 학술회의와 함께 ‘봉산탈춤’ 완판 공연을 ‘풍류극장’에서 약 3시간30여분에 걸쳐 ‘봉산탈춤보존회’의 시연으로 펼쳤다.
기획, 연출, 사회를 맡은 ‘진옥섭’은 ‘봉산탈춤’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쯤 구경 하였고 아는 채 하지만 현재 “완판”을 구경한 사람은 5,000명도 안 될 거라 했다, 사자춤과 눈에 그려지는 탈춤 동작에 익숙해 ‘탈춤’하면 식상하여, 80년 전 전통 ‘봉산탈춤’ 영상이 궁금하지 않았다면 외면하였겠지만 처음 체험한 ‘완판 봉산탈춤’으로 ‘진옥섭’의 외침이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 알 수 있었고 가슴에 와 닿았다.
피리, 대금, 해금, 장구, 북으로 구성된 삼현육각(三絃六角) 악사와 탈을 쓴 노장(老長)스님, 상좌(上佐), 목중(目僧), 소무, 취발이(醉發), 거사(居士), 무당, 사당패, 신 장수, 원숭이, 3형제 양반(兩班), 말뚝이, 영감, 미얄, 등 약 40여명의 출연자 모두가 참석 하여 ‘길놀이’를 시작으로 놀이판에서 ‘고사’를 지낸 후, 제1과장 사상좌(四上佐) 춤/ 제2과장 팔목중춤/ 제3과장 사당춤/ 제4과장 노장춤/ 제5과장 사자춤/ 제6과장 양반, 말뚝이 춤/ 제7과장 미얄할미, 영감 춤으로 끝났다.
제1과장 사상좌(四上佐) 춤은 4명의 상좌가 나와 탈춤의 시작을 알리고, 관객들의 안녕과 만복, 탈춤 판의 대박을 위해 4방신(四方神)에게 기원하는 의식으로 느림의 멋과 고요의 아름다움이 가득 담긴 궁중 춤을 탈을 쓰고 표현 했다.
제2과장 팔목중춤은 8명의 목중이 각각 빨간색, 하얀색, 노란색, 파란색, 푸른색, 보라색, 검정색, 반청(靑) 반적(赤)색의 무복저고리 입고 차례로 나와 자신들의 승려생활을 파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첫째거리와 푸른색과 파란색 두 목중이 법고(法鼓)를 들고 나와 “버꾸놀이하자를 벗고 놀이하자”로 말하며 서로 희롱하는 등, 웃음과 재미의 둘째 거리로 나누어져있다.
제3과장 사당춤은 남녀 사당패와 거사들이 함께 어울려 가면을 위로 젖혀 쓰고 놀량사거리, 앞산타령, 뒷산타령, 경발림 등 서도소리를 부르고 소고(小鼓)놀이를 하며 노는 판 굿이다.
제4과장 노장춤은 노장스님이 소무(젊은 여자)의 유혹에 빠져 타락하는 장면을 풍자한 첫째거리, 신장수와 원수이가 등장하여 노장스님에게 신을 팔려다 강도로 변한 노장스님에게 신만 빼앗기는 둘째거리, 취발이(주색남酒色男)가 노장으로부터 소무를 빼앗고 소무는 취발이의 아이를 낳는 셋째거리의 구성 이다.
제5과장 사자춤은 석가여래의 명을 받고 왔다는 사자가 노장스님을 꾀어 파계시킨 목중들을 벌하는 내용 이다.
제6과장 양반, 말뚝이 춤은 돈으로 양반이 된 삼형제의 무식한 꼴불견 양반 행세를 머슴인 말뚝이가 놀려주는 해학과 풍자의 판이다.
제7과장 미얄할미, 영감 춤은 난리로 헤어졌던 영감을 찾아 나선 미얄할미가 영감의 첩인 용산삼개덜머리집과 싸우다, 영감에게 맞아 죽자 무당이 미얄할미의 혼백을 위로하는 굿을 하면서 끝을 맺는다.
춤이 주가 되고 몸짓과 동작, 재담, 노래 등으로 채워진 보통 탈춤보다 한문 시구(詩句)와 말장난, 야유, 희롱 등이 훨씬 심한 봉산탈춤은, 삼현육각(三絃六角) 반주음악에 이끌려 펼치는 많은 춤사위들이 동적(動的) 보다는 정적(靜的)움직임 많아 순간순간 마치 궁중정재(呈才)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각 과장에서 서도민요, 염불, 타령, 굿거리, 등으로 채워진 다양한 음악과 춤이 함께 어우러져 마치 한편의 특별한 뮤지컬을 보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탈춤의 고정 관념이 깨어 졌고, ‘봉산탈춤’에 대해 편히 쉽게 겉핥기로 알면서 전부라고 믿어버린 태도의 부끄러움을 반성 할 수 있었다.
제 7과정이 시작되기 전 약 7분여동안 감상 할 수 있었던 ‘베리만’의 1936년 음력 7월 15일 백중날 황해도 사리원(沙里院) ‘봉산탈춤’은 시간이 흘러 손상되어버린 전편 영상을 재 편집한 영상으로 ‘봉산탈춤’의 원형이나 현장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 받을 수는 없었으나 ‘탈’들은 현재의 ‘탈’보다 훨씬 커다랗고 더 해학적이었고, 탈춤꾼들의 동작도 훨씬 활발하며 활동적인이었다. 수많은 구경꾼들로 보아 그 시절 ‘봉산탈춤’의 인기와 열기를 유추(類推) 할 수 있었다. 또한 기록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 깨달았다.
원래는 ‘봉산탈춤’은 ‘길놀이’로 악사의 주악을 앞세우고 모든 출연 ‘탈’들이 사리원 읍내를 일주하며 놀다, 길놀이가 끝나면 봉산탈춤의 중흥자(中興者)인 안초목을 위령(慰靈)하는 고사를 지낸 다음, 해가 지면 무동(舞童)춤, 줄타기, 땅재주 등의 곡예와 풍물놀이로 흥을 돋우다 밤늦게 탈춤놀이를 시작하여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졌으나, 6·25전쟁 이후 월남한 연희자들에 의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전승되고 있다한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제1과장부터 제5과장 까지는 하나의 내용으로 연결되지만 제6과장, 7과장은 앞의 5과장과는 생소한 내용이라 원본의 내용 중 서로를 연결 시켜주는 내용이 있었으나 소멸 되어 내용 연결이 불편 한 것인지, 원본에는 없는 내용을 후대의 남쪽 연희자들이 덧붙인 내용 일까? 하는 의문은 남았지만 처음 체험한 ‘완판 봉산탈춤’의 감격과 감동은 오래 이어질 것 같다. 다시 보기 어려운 귀중하고 뜻있는 공연을 마련해주신 ‘한국문화재재단 한국문화의집(KOUS)' 임직원 여러분과 ‘봉산탈춤보존회’ 모든 임께 고마움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