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당(忍堂)박동진(朴東鎭)
- 생몰연대1916.07.12~2003.07.08
- 출생지충남 공주
- 전문분야판소리
인물정보
- 우당 김은덕의 거문고풍류전수
- 추산 전용선 단소 사사
- 1985 국가중요무형문화재 83-1호(구례향제줄풍류) 단소 예능보유자
- 1908 전남 구례군 출생
- 1923 ‘금란회’ 조직
- 1934 명륜전문학교(현 성균관대학교) 수학
- 1936 추산 전용선에게 단소(영산회상가락) 사사
- 1937 일본와세다대학 중문과 통신으로 마침
- 1946 구례중학교 국어 국사를 가르치는 평교사, 교감, 교장 역임
- 1960 4대 국회의원 출마하여 낙선
- 1979 전추산 후계자 발표회 때 단소로 ‘영산회상’ 연주회
- 1980 백경 김무규 소장 단소보 출간
- 1985 중요무형문화제 제 83호로 지정
- 1988 제 1회 군민의 상(교육문화부문) 수상
- 1992 제4회 전남 향토문화상 수상
- 1994 8월 별세
“살다 살다 이런 날도 있구먼, 가슴이 벅차 눈물이 나네.”
-2001년 봄, 국악방송 개국 덕담-
대한민국의 판소리 명창이었다. 충청남도 공주군(현 공주시) 장기면 출신의 판소리 명창이다. 호는 인당(忍堂)이다.
1962년 국립국악원 국악사보가 되었고, 1968년, 국악원장 성경린(成慶麟, 1911년~2008년)의 주선과 당시 각종 창극단에서 악사로 활동하던 한일섭(韓一燮, 1929년~1973년)의 공조로 판소리 《흥보가》의 5시간 완창 발표를 가졌다. 이 발표회는 UN군 사령부 방송 VUNC를 통해 방송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것을 기점으로 1969년 《춘향가》 8시간, 1970년 《심청가》 6시간, 1971년 《적벽가》 5시간,《수궁가》 4시간의 완창 발표를 연달아 진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1970년 《변강쇠타령》, 1972년 《배비장타령》, 《숙영낭자전》, 《옹고집타령》등을 복원, 완창 발표를 가졌고,《성웅 이순신》, 《성서 판소리》등 새 판소리를 작창하는 등 소리꾼으로서 전면적인 활동에 나섰다. 특히 《적벽가》의 완창 능력을 인정받아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또한 같은 해 국립창극단의 단장에 취임하는 등 판소리계 중진 인사로 활약하기 시작하여 90년대까지 연 1회 이상의 연창회를 가졌다. 판소리계에서 소리꾼의 능력을 보여주는 완창 발표회라는 걸 국내에서 정착시킨 게 바로 박동진이다.
1980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고, 1981년에 미국 일주 공연에 참가하였으며, 1982년에는 미국에서 《성서 판소리》를 발표하였다. 1985년 국립국악원 판소리 원로사범에 임명되었고, 1987년 국립국악원 지도위원이 되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후진 양성에 힘쓰기 위해 공주로 내려와 전수관을 개관하는 한편, 여전히 공연 활동을 활발히 펼쳤고,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완창과 장시간 연창을 감행하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 2003년, 공주 전수관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고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고음과 저음이 두루 잘 나와서 소리 능력도 좋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재담과 육담의 대가였다. 서슬퍼런 5공 시절, 정부 행사에 초청을 받아 소리를 하러 갔는데, 그 자리에 대통령이 와 있었다. 그때 사회를 보던 김동건 아나운서가 "영감님이 소리도 잘 하시지만 욕도 아주 잘 하신다던데, 한번 들려주십시오."라고 하자, 대통령 칭찬을 즉석에서 하더니 대뜸 대통령을 지목하며 "저기 저 머리 벗겨진 놈"이라면서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다는 둥, 수상쩍은 구린내를 폴폴 풍겨댄다는 둥 하며 욕을 한 일화는 유명하다.
여하간, 그 걸죽한 재담과 육담은 그의 기가 막힌 즉흥성과 예능감(?)에서 나왔는데, 때문에 SBS의 코미디 전망대에 고정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여하간, 이러한 예능감으로 인해 판소리가 사장길에 접어들었다고 하던 7~80년대에도 이 분의 무대에는 관객들이 제법 많이 들어찼다. 그러나 이 분이 만년에 진정한 전국구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던 것은 우황청심원 CF에서 흥부가를 부르면서였다. "제비 몰러 나간다~ 제비 후리러 나간다~"로 시작하여 '우리의 것은 소중한 것이여.'로 끝나는 CF였는데 당시 이 CF를 모르는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 이때문에 국악계 내부에서는 광대나 후진양성을 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판소리를 그나마 대중들에게 알려줬던 대중성 하나는 현대 국악계에선 절대적이다.
부르는 자리는 안가리고, 또 공연 하는 것을 제자들 소리 가르치는 거보다 좋아하기로 유명했는데, 즉흥성이 짙어서 제자들이 배우기 어려워했더라는 후문. 현재 박동진의 공식적 후계자는 김양숙 현 박동진 전수관 관장으로 박동진의 적벽가를 전수받아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엔하위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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