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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 양지현 / 연출 : 길현주 / 작가 : 유찬숙
월~금 | 16:00 ~ 17:55

일흔 즈음에 / 목요수필회 정진숙
  • 작성자무돌길
  • 조회수1644
  • 작성일2017.05.10

일흔 즈음에 /정진숙

 

친정어머니 뵙고 돌아오는 길, 봄 동 몇 포기 골라보았다. 한겨울 눈 덮인 밭에서 싱싱하게 잎을 펼치고 있는 기운은 대단하다. 겉잎 몇 장은 삶아서 멸치 우린 다시 물에 된장국을 끓이고 나머지 연한 잎은 쌈장에 곁들이니 아삭하게 씹히면서 달큼한 맛이 입맛을 돋운다. 봄이 저만치서 금방 달려올 것 같다. ‘고기보다 맛이 좋다는 옛시조의 한 구절은 이런 맛을 알았음이리라. 어머니는 질경이를 말렸다가 나물로 해주셨고 외할머니는 머위나물의 쌉쌀한 맛이 입맛을 돋는다고 즐겨 드셨었다.

 

 

산판사업에 실패하신 외할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다. 얼큰한 취기로 북을 또드락 딱딱 치면서 할머니의 잔소리에 외면하셨다. 못 배운 것이 한이라고 너희들만은 남에게 뒤지지 말라고 자식들 뒷바라지에 허리 펴실 날이 없던 할머니, “내일 모래면 환갑인데를 한숨 속에 주문처럼 외우시면서 물기 마를 새 없는 손으로 나물을 다듬고 뭔가를 쉬지 않고 하셨다. 아침이면 학교 가기 전, 손 내미는 다섯 놈. 빈손으로 보낼 수 없는 할머니, 주머니는 채울 시간 없이 비워지지만 언젠가는 이 허기진 마음을 채울 날이 오리라 믿으셨다. 어린 내 마음에도 할아버지 환갑이 오기 전에 뭔가 중요한 일을 마쳐야 하는데 그 길이 아득하고 멀어만 보였다.

 

환갑 잔칫날, 높이 쌓아올린 과일이며 음식들을 가득 올린 상을 앞에 하고 곱게 차려입은 아들, , 며느리, 사위, 손자들의 큰절을 받는다. ‘그간 자식들 위해 고생하셨던 세월에 감사드리며 이제 편안히 쉬십시오.’ ‘이제부터는 저희가 부모님을 잘 모시겠습니다.’ 한복으로 곱게 단장하신 두 분의 모습은 가장 행복해 보인다. 안방에 걸린 사진틀 안에 옮겨진 그 날의 모습은 설명해 주지 않아도 큰아들, 작은아들, 헤아려진다. 사진틀 귀퉁이 통통한 손자의 발가벗은 백일사진이 의젓하게 한자리 차지한다. 외할머니는 이런 행복한 모습을 꿈꾸셨을 텐데......

 

 

아랫목 콩기름 먹인 장판이 갈색으로 탄 자리, 할아버지 담배 냄새가 베인 이불에 들어가면 졸음이 달콤하게 밀려온다. “이천 하네가하고 조상님들 얘기를 들려주시지만 난 그다음은 전혀 기억이 안 난다. 집안에 울타리 노릇할 장손이 이런 철부지 기집애라니.....

 

 

외할머니의 행복한 나들이는 환갑이 한참 지난 일흔 즈음이셨을까. 어려운 시간을 잘 극복하신 보람으로 자식농사를 가장 잘 하신분이라고 집안 대소가의 존경을 받으셨다. 아침진지를 드시고 나면 오리가방 챙겨 들고 가까이 사는 막둥이 딸집부터 시작해서 손녀인 우리 집까지 둘러보시고 가셨다. 저녁 식사와 잠자리는 큰아들 집에서라는 철칙을 지키셨다. 형제 없이 자란 내가 십일 남매의 막둥이에게 시집가는 걸 무척 반기셨다. 외롭지 않으리라 믿으셨다. 내가 아들 상현이를 낳았을 때는 며느리 몰래 기저귀 빨래를 도와주시고 한쪽만 바라보며 잠자는 아이의 뒤통수가 틀어질까 봐 잠자리를 바꿔가며 챙겨주셨다. 자식들 키우며 얼마나 힘드셨는지 손자들 돌봐주는 일은 절대 못 한다고 선언하신 분이라 외손녀 아이 뒷바라지는 며느리들에게는 감추고 싶으셨으리라.

 

 

 

포대기 받쳐 아이 업고 오르내린 험한 산길이 할머니의 길이었다면 자갈길 달리는 완행버스처럼 덜컹거리며 뽀얀 먼지를 둘러쓰던 어머니의 길도 한국동란 속에 평탄치는 못했다. 할머니 허리가 휘도록 쌓아준 기반 위에서 내 길은 승용차 타고 시원하게 달리는 고속도로였다. 할머니는 주무시기 전에 늘 다리를 밟아 달라 하셨지만, 온몸이 쑤시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드릴 수 있는 그 잠깐의 시간을 싫다며 나는 도망갔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세월에 가슴이 저려온다.

 

 

어느덧 세월은 자리를 바꿔 할머니가 걱정하시던 그 환갑이 내게 찾아오더니 한 고개 너머에 일흔이 빼꼼히 나를 기다린다. 할머니의 일흔과 어머니의 일흔. 그 옆에 나의 일흔을 나란히 그려본다.

 

 

남편과 나, 둘만 머무는 조용한 집에 귀여운 손자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아침을 연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서인지 집안이 짜랑짜랑 울린다. 거침없이 감정을 표현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남편은 손자의 동영상을 되돌리며 함께 있고자 하지만 그리워하면서 가끔 찾아오는 이만큼의 거리가 참 좋다. 소리만 들어도 나는 알고 있다. 지금 남편은 소리 나는 신발을 신고 신기해서 뒤뚱거리며 걷는 손자 모습을 보고 있다. 발을 움직일 때마다 울리는 짝짝 소리가 나를 즐겁게 한다.

 

 

육아 휴가를 마치고 며느리가 첫 출근을 하는 날, 직장에 있는 아빠도 멀리서 지켜보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어린이집에서 하루를 보낼 손자가 어떻게 적응할지 함께 애가 탄다. 사랑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마음 놓을 수 없는 일도 많아진다. 살아온 날보다 앞에 남은 날이 그리 길지 않음을 알기 때문일까. 나를 위한 일에서 벗어나고 내 일에서 벗어나니 나의 일흔은 이렇게 내 사랑하는 가족들을 향해 안테나를 높이 세운다.

 

 

 

은퇴, 영어로는 'retire' 라 한다니 맞는 말이라고 그래그래고개를 끄덕여본다. 나도 새 타이어로 교체하고 다시 한 번 달려보자. 할머니는 다리가 쑤셔오는 밤에도 열심히 일을 찾으셨는데. 내가 꿈꾸던 내 모습에서 나는 얼마나 멀리 와 있는 것일까.

 

 

태국의 화려한 춤의 무희가 되고 싶었던 예술제가 사춘기의 나를 유혹했고 가수 후안 가브리엘의 공연을 보며 멋진 공연의 기획을 꿈꾸었다. 많은 청중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것은 감동을 주는 음악공연이라고, 언젠가 그런 날을 만들어 보리라. 안드레 류의 화려한 공연을 보며 내가 부자라면 세계를 돌며 이런 공연을 보여주리라 꿈꾸었다. 시집갈 돈으로 음악 감상실을 만들겠다고 헛소리하던 때도 있었지만, 깊은 우물에 이끼 사이로 맺힌 물방울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어 화가를 탐냈던 시절이 있었으니 그림 그리는 남편을 대신 택한 운명이었나 보다.

 

 

나대신 딸에게 기회를 주신 건가. 소연이는 음악전문 연출가다. 음악방송국의 피디로 네 시간 생방송 하는 프로그램 <마마>를 홍콩에서 총감독하기도 했다. 삼 개월 전부터 기획하고 준비하지만 리허설 준비로 삼 일간 꼬박 밤을 새우고 본방송 마친 저녁엔 파김치가 되어 파티에도 참석을 못하고 잠에 빠졌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귀국 후 만나보니 너무 야윈 모습에 조금이라도 휴식을 주고 싶어 서둘러 돌아와야 했다. 화려한 시간 뒤에는 이런 힘든 노력과 고충이 숨어 있음을 모르고 아름다운 감동의 순간만을 전부라 생각하며 꿈꾼다. 무대 위의 스타를 빛나게 하기위해서 무대 뒤의 수많은 연출진이 피곤의 기색을 감추어가며 작품을 이루어내는 과정을 미처 알지 못한다. 이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우리는 성취하지 못한다.

 

 

어떤 꿈을 갖고 있는가. 얼굴은 꿈 따라 변화한다. 일흔에 품은 꿈은 내 모습을 행복한 여인으로 만들지 않을까. 나는 작은 음악회로나마 내 꿈을 실천하리라. 내 작은 음악회는 시디 한 장에 담겨 전해진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듣고 싶었던 아름다운 음악들을 선곡해서 시디를 만든다. 그 시디에는 옛 우리 가요도 있고 젊은이들이 즐겨듣는 댄스음악도 있다. 가슴 설레며 보던 드라마의 주제곡도 있고 내 젊은 날 짝사랑에 눈물 감추며 듣던 애닮은 노래도 있다. 새 차를 산 친구에게서 고맙다고 문자가 온다. 엊저녁 내린 눈으로 음악을 들으며 바라보는 설경이 너무 아름다웠다고...... 음악이 좋아 한없이 그 길을 달리고 싶더란다.

 

 

내가 만든 음악회는 화려한 무대도 수많은 관중도 없다. 출근길의 신호를 기다리는 누구에겐가 조용한 기다림으로 안정을 주고, 주말여행을 나선 친구의 봄나들이에 벚꽃엔딩을 들려주리라. 설거지 시간이 힘든 가사 시간이 아니다. 박자 맞춰 흔드는 어깨가 신난다. 유치원 다니는 손자가 < 청춘>을 부른다고 자랑이 들려온다. 할머니가 매일 듣다보니 손자가 따라 부른단다.

 

 

기쁜 노래는 나이를 훌쩍 뒤로 돌려 행복한 시간에 머물게 하고 슬픈 노래는 울고 싶은 이의 가슴을 열고 친구가 되어 함께 울어 주리라.

 

 

일흔 고개를 넘는 날,

 

내가 살아온 그동안의 얘기들을 모아서 사랑하는 이들과 나누리라. 시인의 아름다운 표현을 넘보지 못하고 이름난 작가의 묘사를 닮을 수 없을지라도 차마 말하지 못한 얘기도, 부끄러워 감추었던 순간도 담아 보리라. 평범하고 자랑할 것 없는 칠십 년, 그러나 늘 꿈을 꾸고 살았던, 부족하고 못난 본연의 모습 그대로라면 친구들은 변함없이 나를 아껴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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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0일 출연하신 목요수필회 정진숙 님의 작품 중에서 한 편 올려 드립니다.

누구 보다 젊게, 신나게, 아름답게 사시는 어르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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