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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문화유산 시리즈

진행 : 길현주 / 연출 : 김정은
월~금 | 10:55, 19:55(재)

2020-06-22(월)남도문화유산 381회(보물 제482호 윤선도 종가 문적 (尹善道 宗家 文籍))
  • 작성자남도문화
  • 조회수403
  • 작성일2020.05.28

남도 문화유산을 찾아서 

 

2020-06-22 () 10:55/19:55()

 

 

 

이 시간 함께 할 문화유산은 전라남도 해남에 있는 보물 제482

윤선도 종가 문적 (尹善道 宗家 文籍)입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면서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의 3대 시가인으로 불리는 고산 윤선도는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유배와 은둔으로 보냈지만, 그 덕분인지 많은 글과 유적들을 남겼습니다. 해남 윤씨 문중에서는 선생이 손수 쓴 금쇄동집고’, ‘금쇄동기’, ‘산중신곡’, 그리고 선생과 관련된 문서들인 은사첩예조입안등의 문적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윤선도는 1587년에 태어나 8살 되던 해에 큰아버지에게 입양되어 종가인 해남으로 내려갑니다. 지금 소개해드리는 문적 중에서 예조입안은 이 입양을 예조에서 허가하는 문서입니다. 윤선도는 20세에 소과를 1등으로 합격했지만 성균관유생 신분으로 집권세력을 비난하다가 유배됩니다. 인조반정 때 풀려나지만 곧 사직하고 낙향합니다. 42세 때는 대과에 장원급제하고 궁에 들어와 봉림대군을 가르치는데요, 모함으로 파직됐습니다. 후에 효종이 된 봉림대군이 스승인 윤선도에게 여러 곡식을 내렸던 송장을 모은 것이 바로 은사첩입니다.

 

병자호란 때는 청과의 화친소식을 듣고 실망해 제주로 가던 중 표류한 보길도에서 아예 은거합니다. 이후 또 유배됐다가 해남으로 돌아가는데, 이후 선생은 해남의 금쇄동에 정원을 조성하고 금쇄동과 보길도를 오가며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해남 금쇄동에서 지낼 때 중국 시인들의 시를 필사한 것과 직접 지은 한시, 또 우리말 단가를 모아 묶은 것이 금쇄동집고구요, 또 다른 한시집이 금쇄동기, 그리고 보길도와 금쇄동의 자신의 생활을 풍자한 단가집이 산중신곡인데요, ‘오우가를 비롯한 우리말 시조 20수가 담겨있습니다.

 

선생은 정치적으로 열세이던 남인 가문에서 태어나 집권세력인 서인에 맞서 왕권 강화를 주장하다가 20여년의 유배, 19년의 은거생활을 했습니다. 다행히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보길도의 부용동과 해남의 금쇄동에서 풍류를 즐길 수 있었고, 아름다운 시조들을 통해 우리 말의 격을 한층 높였습니다.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이 문적은 고산 윤선도 선생의 개인사 및 조선시대 가족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남도 문화유산을 찾아서...

이 시간 함께 한 문화유산은 전라남도 해남에 있는 보물 제482

윤선도 종가 문적 (尹善道 宗家 文籍)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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