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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문화유산 시리즈

진행 : 길현주 / 연출 : 김정은
월~금 | 10:55, 19:55(재)

2020-06-23(화)남도문화유산 382회(전라북도 기념물 제91호 이석용 생가 (李錫庸生家))
  • 작성자남도문화
  • 조회수439
  • 작성일2020.05.28

남도 문화유산을 찾아서 

 

2020-06-23 () 10:55/19:55()

 

 

 

이 시간 함께 할 문화유산은 전라북도 임실에 있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91

이석용 생가 (李錫庸生家)입니다.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이자 전라북도를 대표하는 의병장이었던 이석용 선생의 생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집은 1870년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이석용 선생은 1878년에 이곳에서 태어나서 1903년경 까지, 25년간을 이곳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피끓는 청년기에 국제정세의 혼란과 일제의 야욕을 보며 울분을 느꼈던 선생은 각지를 순회하여 학문과 시대를 논합니다. 특히 면암 최익현과 연재 송병선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으면서 선생은 이제 행동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1907년 고종이 일제의 강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군대가 해산되자 선생은 호남 유림들과 함께 진안의 마이산에서 드디어 의병을 일으킵니다. 진안에서 일본군을 쫓아내고 군수물자까지 획득하는 성과를 올리는데요, 결국 숫자로 당할 수 없게 되자 지리산으로 일단 철수했다가 장수 쪽에서 배후를 기습해 큰 승리를 거둡니다.

 

1908년에는 남원으로 진격했다가 임실로 후퇴하고 거기서 일본의 죄상 10조를 적은 격문을 지어보내기도 했습니다. 남원과 전주에서 패한 후 순종에게 국가의 백년대계를 상소하고 1913년에 다시 의병을 모집해 일본군과 싸울 준비를 했지만,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44, 37세의 나이로 대구 형무소에서 처형되었습니다기록에 의하면 그는 심지가 굳고 명민한 사람으로, 전사한 병사를 일일이 묻어주는 따뜻함이 있었고 동시에 의병들의 기강을 엄격히 해서 민가와의 충돌을 최소화해 명성이 자자했다고 전해집니다.

선생의 생가는 앞면 3·옆면 2칸 규모의 초가집입니다. 자연석 주춧돌 위에 둥근기둥을 세웠고 1칸짜리 방 두 개에 오른쪽에는 부엌이 딸려있는 구조입니다. 마루는 건축 당시에는 없던 것을 후대에 설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집은 19세기 말에 지어진 오래된 가옥이라는 점에서 건축학적 가치도 있지만, 그보다는 독립운동가 이석용 선생의 삶과 정신을 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더 큰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남도 문화유산을 찾아서...

이 시간 함께 한 문화유산은 전라북도 임실에 있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91

이석용 생가 (李錫庸生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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