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의집(KOUS)에서 2010년에 시작하여 2012년 한해만 거르고, 매년 우리 음반사 체계를 정립하신 금옥(金玉)같으신 분들을 모셔서 소중한 시간을 가져오고 있는 반락(盤樂)의 2016년 마지막 주인공은 ‘진용선(秦庸瑄)이었다.
정선아리랑연구소소장으로 우리 민족의 아리랑과 아리랑의 해외 확산, 중국, 일본과 유라시아와 미주지역으로 전파된 아리랑의 현지 수용과 전승에 대해 연구하는 우리 음악사 정립부문에서는 보석 같은 소중한 사람 중 한 사람이다. 특히 일반인들이 착각하기 쉬운 ‘정선아리랑’을 부각 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100여종 만(萬) 여수가 넘는 우리 ‘아리랑’ 전반에 관하여 자신의모든 것을 쏟아 붇고 있는 크게 표 나지 않는 거인이다.
서울에서 토플강사로 잘 나가던 진용선이 1980년 중반 ‘폴모리아 악단(Paul Mauriat Orchestra)’의 아리랑을 듣고, “ 이 악단이 왜 ‘아리랑’을 연주할까?”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고, 아리랑 가사 중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를 자신이 전공한 ‘독일어’로 번역 할 수 없어, 이 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1년 고향으로 내려가 ‘아리랑’에 푹 빠져 버린 살아있는 ‘아리랑’이다.
아리랑은 언제부터, 어떤 형태로 불리기 시작 했는지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발견된 최초기록은 조선후기에 나타나며, 구체적인 사실로는 ‘흥선 대원군의 경복궁 중수’ 사업을 통해 각 지역의 민요에 붙어 조선팔도로 확산 되었고, 1860년부터 1930년대 까지 조선 백성이 약 200만 명이 해외로 떠나가 아리랑은 ‘집 떠난 이들의 노래’가 되었다 한다.
1896년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Homer B Hulbert)의 경기자진아리랑에 바탕을 둔 최초의 서양식 기보 ‘구 아리랑’ 악보/ 같은 해 민국인 인류학자 플레쳐(Alice Conningham Fletch)가 한인 미국 유학생 안종식, 이희철, 양손,이 부른 아리랑을 원통형 음반에 최초 채록/ 1916년 1차 대전 당시 러시아 군인으로 참전하여 독일군 포로가 된 연해주 거주 조선인 김 그리고리, 안 스테판, 등 조선인 2세 다섯명이 프로이센 포로 수용소에서 부른 ‘아리랑’을 독일인 언어학자 들이 채록한 음원/ 그 시절의 ‘아리랑’을 증명 하는 이것들을 영상으로 보여주고, 음악으로 들려주었다.
일제 강점기인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이 영화로 상영되면서 아리랑 열풍이 불며 민요개념으로 유행처럼 전국에 널리 퍼졌고,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이 시기동안 아리랑 음반이 60여종 발매되었다. 만주 지방을 울린 아리랑은 창가 풍으로 항일 투쟁가가 되었고, 조선족 농민의 기쁨을 노래하며 북한의 노래 풍을 형성 하게 되었다. 이 아리랑이 중앙아시아로 흘러든 북한의 아리랑이었다.
6.25 전쟁 중 심리전에 사용된 아리랑은 중부전선에서 40여명이 북한군이 귀순 하였고 전쟁 기간 동안 군인들의 심금을 울린 아리랑은 참전국 군인들을 통해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 미국에서 위문공연 차 한국을 찾아온 재즈 연주자 '오스카 패티포드(Oscar Pettiford)'가 1952년 ‘아디동블루스’로 음반을 출원하여 1950년대 미국에 ‘아리랑’열기로 달구었고 재즈번전으로 영국과 이탈리아 등 유럽 곳곳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아리랑 재즈음반이 인기를 얻자, 여가수 '엘리 윌리엄즈(Elly Williams)'가 아리랑을 노래로 취입 했고 1954년 ‘이주의 음반’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해 벨기에 유명 여가수 '라 에스텔라(La Esterella)'가 ‘엘리 윌리엄즈’ 아리랑을 자국어로 번역해 필립스 레코드로 음반을 발매 되었고, 이것을 ‘폴모리아 악단’이 매혹적인 연주로 바꾸어 아리랑을 세계적인 음악으로 바꾸어 놓았다.
더 많은 주옥같은 아리랑 이야기들을 나의 시각으로 선별하여, 주요 가지만 대략 정리해도 긴 이야기를 약 2시간 동안 전해 들으며, 우리 근 현대사에서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귀하고 귀한 ‘아리랑 음원’과 영상 자료들의 맛보기만을 감상할 수 있어 많은 아쉬움의 진한 여운이 가시지 않는 ‘진용선의 반락’ 그냥 행복 했다. 무럭무럭 솟구치는 고마움이 아직도 뜨겁다.
‘반락’에 출연한 모든 임들이 없었다면 우리 누가 이런 큰일들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우리 음반의 역사를 음원의 발자치를 그림자라도 밟을 수 이었을까? 이들이 진정한 거인 이라고 세상에 말하고 싶다. 이 무대를 만들어 주신 한국문화재단과 한국문화의집(KOUS)과 많은 수고와 땀을 아끼지 않은 관련 종사자 모든 분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며 축원의 박수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