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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문화유산 시리즈

진행 : 길현주 / 연출 : 김정은
월~금 | 10:55, 19:55(재)

2020-07-30(목)남도문화유산 409회(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7호 매천사 (梅泉祠))
  • 작성자남도문화
  • 조회수339
  • 작성일2020.07.02

남도 문화유산을 찾아서 

2020-07-30 () 10:55 / 19:55()

 

 

 

이 시간 함께 할 문화유산은 전라남도 구례에 있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7

매천사 (梅泉祠)입니다.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방광제 저수지 옆에는 한말의 순국지사이자 시인이며 역사학자였던 매천 황현(1855~1910)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 매천사가 서 있습니다. 선생의 후손과 지방 유림들이 1955년에 세운 건물인데요, 이곳은 선생이 생전에 살았던 집터로 현재까지 사랑채가 남아 있습니다. 사당은 앞면 3·옆면 1칸 규모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입니다.

황현 선생은 1855년 전라남도 광양에서 태어났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선생은 황희 정승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짓고 재질이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 고종 22년인 1885년에는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지만 관리들의 부패상에 실망하고 관직에 나가기를 단념합니다. 이후 선생은 고향에 은거하면서 초가 3칸을 지어서 구안실(苟安室)이라 이름하고 학문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습니다. 이렇게 선생은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과 교유하고 안목을 넓히면서 비판적 지식인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선생의 나이 마흔이던 1894년에는 동학농민운동·갑오경장·청일전쟁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이런 격동의 시기에 위기감을 느낀 매천 선생은 매천야록(梅泉野錄)·오하기문(梧下記聞)같은 역사서 집필에 몰두했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연금을 모집하는 등 국권회복 운동을 시도하지만 실패합니다. 결국 1910년 일제에게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선생은 절명시 4편과 유서를 남긴 후 아편을 마시고 자결했습니다.

 

시에 뛰어났던 매천 선생은 문장가인 이건창, 한문학자인 김택영과 함께 한말삼재(韓末三才)로 불렸습니다. 생전 선생은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의 저서를 즐겨읽고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가 남긴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은 경술국치 이전 약 50년 간의 사회 변화를 기록한 것으로 근대사의 중요 자료로 꼽힙니다. 이곳 매천사는 근대 격동기에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지식인 매천선생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공간입니다.

 

 

남도 문화유산을 찾아서...

이 시간 함께 한 문화유산은 전라남도 구례에 있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7

매천사 (梅泉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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