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리> 그래서 내가 건너온다고 허니 하인들이 들에 갔다고 걱정을 허시면서 쌀 닷말 돈 서른냥을 형수 시켜 주시기에 쌀 속에 돈을 넣어 뭉뚱거려 짊어지고 허둥지둥 건너오는디 요넘어 질모퉁이 고개를 막 당도허니 십여명 도적놈들이 나서더니 호령을 허되 ‘네 이놈 흥보야 이놈 전량이 크냐 목숨이 크냐 엎어뺨 한주먹에 대번에 쥐가 나고 정신 차릴 길이 었읍디다. 그래서 죄다 빼았기고 몽둥이로 죽게 맞고 왔오.’ 「흥보 아내 이말 듣고 자세히 살펴보니 쑥들어가 두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간신히 살 가리운 고의 뒷폭 툭 무너져 바싹 마른 볼기짝에 몽둥이 맞은 흔적 피가 곧 솟는지라.
<중중모리>
흥보 마누라 미친듯이 두 손뼉 땅땅 허허 이것이 웬말인가? 그런대도 내가 알고 저런대도 내가 아오. 시숙님 속도 알고 동서속도 내 다 아오. 동냥은 못 줄망정 박자조차 깬다더니 여러날 굶은 동생 안주면 그만이지 이모양이 웬일이여. 방약무인 도척이도 이보다는 성현이요. 무고불측 관숙이도 여기 대면 군자로세. 세상 천지간에 이런 일이 또 있는가. 가기 싫어 허시는걸 방정맞은 계집년이 궂이 가라고 우기었다. 이 지경을 당하였네. 국난에 사양상이요 가빈에 사현처라. 내 얼마나 음전허면 불쌍헌 우리 가장 못 멕이고 못 입힐까 가장은 처복 없어 내 죄로 굶거니와 철 모르는 자식 정상 목이 메어 못 보것네. 차라리 내가 죽어 이꼴저꼴 안 볼란다. 초마끈으로 목을 매어 죽기로 작정허니 흥보가 기가 막혀 마누라 손을 잡고 아이고 마누라 이것이 웬일이요. 부인의 평생 신세 가장의게 매었는디, 박복헌 나를 만나 이 고생을 당케허니 내가 먼저 죽을라네. 허리띠를 끌러내어 서끌에다가 목을 매니 흥보 아내 깜짝 놀래 와르르르르르 달려들어 흥보를 부여잡고 아이고 영감 내 다시는 안 울테니 이리 마오. 손목을 마주잡고 둘이 서로 통곡허니 초상난 집이 되었구나.
<아니리>
이렇듯 흥보내외 붙들고 우는 통에 자식들까지 따러 울어노니 그야말로 흥보 집안이 뭇초상난 집이 되었겄다. 그때 마침 흥보를 살릴 중이 하나 내려 오는디.
<엇모리>
중 내려온다. 중 하나 내려오는디 저중의 모양을 보소 헐디헌중. 서리같은 두 눈썹은 왼낯을 덮어있고 크다큰 두 귓밥은 양어깨에 닿을 듯. 노닥노닥 지은 장삼 실띠를 띠고 다 떨어진 송락은 요리 송 치고 조리 송쳐 호옴뻑 눌러쓰고 동냥을 얻으면 무엇에다 받어갈지 목괴짝 바랑 등물 하나도 안가지고 개미하나 안 밟히게 가만가만 가려딛고 염불허며 내려온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흥보 문전을 당도허니 처량헌 울음소리 귀에 얼른 들린다. 저중이 깜짝 놀래 가만히 들어보니 사생이 미판이로다. 저 중이 목탁을 치며 지나가는 걸승으로 어진 댁을 왔사오니 동냥 한 줌 주옵시오. 나무아미타불 이 댁에 동냥 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