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26
신청곡=여럿이 함께 부르는 아리랑 혹은 강강술래
이로써 구례, 이리, 그리고 대전지역에 전승되어 오는 향제줄풍류의 맛은 쬐~~~금 본 것 같습니다. 앞으로 갈 길이 멀지요.^^ 제가 아직은 감상평을 쓸 정도의 실력이 안되어서 듣고 또 듣고 하면서 좀 더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줄풍류의 문인음악이 국립국악원의 장인음악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좀 더 성찰할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지난 주 최문진 선생님의 가야금 독주는 혼자 듣기에 좋았습니다. 공부하면서 여러 번 다시 듣기로 틀어놓았습니다. 생각의 흐름과 소리의 흐름이 묘한 긴장을 만들어 서로 타고 오르는 경험이었습니다. 두 가지 흐름이 방해할 정도로 엉키지 않았고, 무심할 정도로 성기지 않았습니다. 서로 독립적이면서 공존하고, 서로 도와주면서 상생하는 그런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아마도 한국음악에서 병창과 병주는 소리의 흐름을 그냥 병치시켜서 공존하는 첫 번째 단계의 ‘협동=울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풍물의 암수놀음처럼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기 시작하는 단계가 시작하는 것이겠지요. 물론 풍물의 암수놀음이 고대의 모습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1970년대(년대가 맞나요?) 사물놀이라는 형식으로 정착이 된 이후에나 만들어진 연주기법이겠지요? (방송에서 대답을 해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제가 공부할게요. 제가 국악산책의 모든 시간을 독점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ㅎㅎ)
이에 생각이 서양음악의 화음과 합창에 이릅니다. 과연 동양음악에는 화음과 합창이 있었을까? 송지원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생각해보니, 한국음악에는 단조(악보구성의 규칙=악보에 파트를 만들어 넣을 공간은 있는데 그냥 비어 있더군요)와 같은 시스템과 작곡가(인물=사람)가 중요하지 않았던 문화(적층문화=전통=관습=관행)가 있었기 때문에 화음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고, 합창이라는 연주형태로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흐음, 제가 제대로 이해했나요? 자신이 없네요.)
= “시스템(악보, 규칙)과 문화(적층, 개인이 아니라)가 화음과 합창을 만들지 못했다.”
= “시스템과 문화가 화음과 합창을 만든다”
그런데 이렇게 써놓고 보니 두 가지 명제가 모두 사회과학적 사실이 아닐 것만 같습니다. 그럼, 뭘까요?
우선, 사실을 확인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진짜로 한국음악에는 서양음악과 같은 화음과 합창이 없나요? 혹시 동양음악에는 서양음악과 같은 화음과 합창이 있는 나라가 있나요? 동남아시아까지는 아니어도, 일본이나 중국의 음악 정도만 비교해보더라도 여럿이 나와서 부르는 모습은 보기 힘든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신청곡은 적어도 5인 이상이 부르는 ‘아리랑’이나 ‘강강술래’를 듣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참 고맙습니다. 제가 이렇게 불쑥 화두처럼 한 마디 열쇠말을 던져 놓으면, 마치 숙제를 하듯이 음악을 찾아서 들려주시는 피디님이 정말 고맙습니다. 복 받으실 거에요.^^ 이 말은 송지원 선생님이 방송에서 꼭 해주시길 바랍니다.)
게시판에 공개글로 이렇게 적어두는 이유는
여기를 방문하시는 다른 분들의 의견도 듣고 싶어서입니다.
혹시 댓글로 의견을 주시면 참 고맙게 듣겠습니다.
게시판을 공부판으로 한 번 만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항상 국악산책과 함께 음악 이야기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공례 외 김항규, 설재림, 김기순, 박종단, 박복자, 김종숙 여러분의 소리로
강강술래 준비하겠습니다
11월 28일(목) 국악산책도 함께 해 주세요~!